정의
타원형 볼을 사용하여 손과 발을 자유롭게 쓰며 정해진 시간 내에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볼을 가진 선수를 붙잡거나, 넘어뜨리는 등 격렬한 스포츠이며, 많은 득점을 함으로써 두 팀 간에 승부를 겨루는 운동경기이다.
팀의 구성
양 팀은 각각 15명 이내의 선수로 구성되며, 경기 도중 부상자에 한하여 7명의 교체가 가능하다. 경기 시간은 중학교팀은 50분, 고등학교팀은 70분, 대학교팀은 80분, 국제경기 80분씩을 전후반으로 나누며 중간에 휴식 시간 10분을 둔다. 득점 방법은 트라이 5점, 트라이 후의 골 2점, 페널티 킥에 의한 골 3점, 이 밖의 드롭킥에 의한 골 3점이 있다.
심판은 주심 1명, 터치저지(touch judge)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운동경기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다.
시설
럭비 경기장은 필드오브플레이와 인골 구역, 기타 주변에 필요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드오브플레이의 길이는 100m이고 폭은 터치라인의 길이인 69m이다. 인골 구역은 양쪽 진영에 각각 22m의 길이로 구성되어 있다. 22m 라인은 반드시 골라인에서부터 22m 거리에 있어야 하며, 10m 라인은 하프 웨이 라인에서 10m 거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5m 라인 15m 라인도 반드시 거리를 지켜야 한다. 지면은 잔디로 덮여 있거나 또는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굳은 흙이나 모래로 되어 있어야 한다. 골포스트는 양측 골라인 중앙에 세우는 포스트로서 지면에서 크로스바의 상부까지는 3m, 골포스트의 안쪽에서 안쪽까지는 5.6m가 되어야 하며, 포스트의 높이는 3.4m 이상이면 되나 심판의 판정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높을수록 좋다.
기술
럭비 풋볼의 개인 기술로는 패스·캐치·킥·드리블·세이빙·태클 등이 있다.
패스
럭비 풋볼의 가장 기초가 되는 중요한 기술이다. 공은 옆으로나 뒤로만 패스할 수 있으며, 앞으로는 패스할 수 없다. 항상 두 손으로 공을 잡고 패스하는데, 정지 상태에서 하는 스탠딩 패스와 달리면서 하는 러닝 패스 등이 있다.
캐치
공을 주시하고 두 손을 가볍게 벌려 공을 받는 즉시 다른 동작으로 연결한다.
킥
공은 킥에 의해서만 앞으로 보낼 수가 있다. 펀트 킥·드롭 킥·플레이스 킥 등이 있다.
드리블
달리면서 발의 안쪽과 발등을 사용하여 공을 다루는 기술.
세이빙
상대편의 드리블 공격을 일시적으로 수비하거나, 몸을 옆으로 굴려 공을 끌어안아 상대방의 전진을 막는 기술.
태클
상대편이 공을 가지고 달릴 때 넘어뜨려 전진을 방해하거나 패스 또는 킥을 못하게 막는 기술.
특성 및 효과
럭비는 단적으로 격렬하게 몸과 몸을 부딪치고 신체 접촉이 이루어진다는 운동이다. 공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있어 손과 발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점도 중요한 특성이라 할 것이다. 격렬함 때문에 난폭한 경기로 잘못 생각할 수 있으나 희생, 봉사, 협동, 심판에 대한 절대복종하는 신사적인 스포츠이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30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한곳에서 경기를 해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기후 조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도 있다. 비가 오나 눈보라가 몰아쳐도 경기는 지속된다. 오히려 선수들은 흙투성이가 되어 경기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역사
럭비의 시초는 그리스·로마에서 즐기던 풋볼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볼 경기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현대 럭비의 발생은 1823년 영국 럭비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럭비 경기를 하는 도중 윌리엄 웹 엘리스(William Webb Ellis)라는 소년이 규칙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손에 들고 앞으로 달려갔다. 상대 선수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선수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이 소년은 한 손에 공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덤벼드는 다른 선수를 밀어제치고 전진하여 상대방 골문으로 돌진하여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우발적인 사건으로 지금의 럭비 경기가 생겨났다. 그 뒤 손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현대 럭비 경기가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에 널리 보급되면서 세계적인 스포츠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72년에는 영국의 럭비풋볼유니언이 설립되었고, 1873년 스코틀랜드, 1879년 에이레, 1880년 웨일스 등에 각각 유니언이 설립되어 이들 유니언의 대표팀 간에 국제시합이 전개되었다. 1890년 4월에는 국가별로 서로 다른 경기규칙을 통일하기 위하여 국제 럭비 풋볼 보드가 결성되었다.
럭비 경기는 1893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실시된 후 영국 본토와 자치령, 그리고 유럽에도 보급되어 순수 아마추어 경기로서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역사
1920년대 초에 시작되었고 당시 경기는 주로 경성전기·철도청·총독부·경성사범학교·경성중학교 등을 중심으로 행하여졌다.
1929년 3월 조선 럭비축구협회가 창설되면서 럭비의 보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양정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 등이 럭비선수단을 창단하여 일본인 학교와 시합을 하면서 발전하였다.
특히, 1929년 5월에 창단된 보성전문학교팀은 1929년 10월 일본 관서지부 추계리그전에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1946년 3월에는 조선럭비축구협회가 창설되어 지금까지 많은 원정경기와 국내 시합을 주관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군의 체력강화 목적 및 전력 증강을 위하여 육·해·공군사관학교, 1군단육군공병학교·12사단·25사단·수도사단·육군군사정보부대 등 많은 팀이 구성되어 럭비 경기가 활기를 띠었다.
1957년 12월에는 대만 체육협진회의 초청을 받아 육국 군사정보 부대팀이 광복 후 처음으로 원정경기를 가졌고, 1961년 4월 이후부터는 일본과의 친선경기를 갖기 시작하였다. 1964년 5월에는 일본 호센(保善)고등학교가 내한하여 경기를 가졌고, 1967년 1월에는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합팀이 일본에서 원정경기를 갖게 되어 한일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의 김종렬(金鍾烈,) 태국의 차아록(Chaloke), 일본의 긴노(金野滋) 등의 발기로 아시아럭비연맹을 구성하고 2년마다 아시아선수권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고 1967년 제5회 대회와 1992년 제13회 대회는 우리나라에서 유치하였고, 1982년 제8회 싱가포르대회에서는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최초로 우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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